[인터뷰] 서영길 택배기사님과 큰딸

힘들어도, 전해지지 않을지 몰라도 초인종을 누르며

좀 더 다정하게 목소리를 내려고 가다듬는다.

-비대면 친절 中-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얼마 전 서점에서 눈에 띄는 제목을 발견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무슨 뜻인가 하고 표지를 자세히 봤는데 택배기사가 택배를 들고 있는 모습의 귀여운 삽화가 그려져 있었고 작가 이름 대신 ‘택배기사님과 큰딸 지음’으로 되어 있었다. 제목과 미상의 작가 이름에 이끌려 구매한 책에는 26년간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는 아버지가 기록한 기사 수첩을 바탕으로 택배를 둘러싼 다양한 희로애락을 담고 있었다. 오늘 나에게 택배를 전달한 기사님이 바로 이 책 속에 기사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며 택배기사님과 큰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책 표지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책 표지

택배기사의 평범한 수첩이 ‘책’으로
‘택배가 오늘 도착할 예정입니다’ 이 말은 아마 현대인들을 설레게 하는 말 중 하나가 아닐까. 그만큼 택배를 많이 시키는 요즘 시대에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은 책 제목으로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제목에 대해 택배기사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지 않냐며 “글쓰기 모임에서 지인이 추천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택배를 기다려 본 적 있는 모두가 택배를 배송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해 쓰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아버지 서영길 씨는 올해로 26년 차 택배기사다. 서영길 씨는 “1998년부터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지만 다리에 힘 풀릴 때까지 일하고 싶다”라며 본인을 소개했다. 그는 처음 일을 시작할 때 고객과의 불편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그때마다 기사 수첩을 적으며 훌훌 털어버린 결과 26년이라는 시간 동안 택배를 사랑하며 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은 택배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썼다는 기사 수첩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바쁜 와중에도 기사 수첩을 쓰는 이유에 대해 서영길 씨는 “처음엔 여기 저기 배송하다 보니 갑자기 고객에게 전화가 오면 어디가 어디인지 헷갈려서 메모하던 습관이 어느새 일지가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은 그렇게 열심히 못 쓰는 대신 가족들하고 대화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라고 덧붙였다.

서영길 택배기사의 큰 딸인 작가는 “엄마의 유럽 여행으로 아빠와 보름 정도 둘만 있는 시간을 보내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대화의 8할은 아버지의 업무 이야기였다”며 “듣다 보니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이야기가 글이 되면 누군가 볼 수 있겠다 싶어 글을 쓰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문 앞에 택배를 두고 전달하지 못한 아빠의 마음, 이런 것을 기록하지 않으면 무엇을 남겨야 하나라는 생각에 책을 쓰게 됐다”고 덧붙였다.

서영길 씨의 실제 기사수첩 (사진제공=서영길 씨)
서영길 씨의 실제 기사수첩 (사진제공=서영길 씨)

[Episode-1] 세월의 변화를 알게 해준 ‘그 집이 어디죠?’
올해로 26년째 택배기사로 일하고 있는 서영길 씨가 느끼는 택배 산업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 그는 “택배뿐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 디지털·시스템화가 가장 큰 변화인 것 같다”며 “예전엔 송장에 일일이 수취인 사인을 받고 혹여 물건이라도 사라지면 오롯이 기억에만 의존해 끙끙 앓았다”고 설명했다. 책에 적힌 많은 일화 중 ‘물건을 못 받았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일화들이 많다. 하루에 신고 되는 택배 분실 사고가 적지 않다는 의미다.

책의 한 일화를 소개하면, 서영길 씨는 그날도 어김없이 물건이 없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루에 300곳 넘게 방문하는 그는 “어디시죠?”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황당하도록 비슷하다고 한다. “집이요.” 그는 택배 일을 오래 하다 보니 이젠 머릿속에서 기억이 아닌 기록까지 된다고 했다. 그 집은 집주인이 직접 받은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어 서영길 씨는 다시 그 집에 찾아갔다. 전화한 고객과 다른 사람이 나왔고 알아보니 택배시킨 주인이 2년 전 이사 간 집의 주소지를 변경하지 않아 생긴 일이었다. 현재 집주인은 왠지 택배기사가 다시 찾으러 올 것 같아 어떤 조치도 하지 않은 채 물건을 현관에 그대로 두었다고…

지금은 배송 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고객에게 보내면 기록이 남고 또 어딜 가나 CCTV가 있어 물건이 사라져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래서인지 서영길 씨 휴대전화에는 본인의 얼굴도,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도 아닌 알지도 못하는 이의 현
관 앞 사진들도 꽉 차 있다. 똑같아 보이는 여러 사진 속에서 그는 어느 집 현관 앞 상자인지 망설임 없이 찾아내곤 한다.

서영길 씨는 “이전처럼 고객 한 분 한 분 기억하면서 일할 필요가 없어져 편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다”고 설명했다. 큰 딸인 작가는 “아버지의 사진첩을 보며 전달하지 못한 아빠의 마음을 알아버린 기분”이라며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만큼 삶을 깨닫게 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Episode-2] 잊을 수 없는 ‘6시 50분 해물만두’
서영길 씨는 “택배가 늦게 온다고 질책을 받기도 하고, 잘못하지 않은 일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어떤 이는 자신이 올 시간에 맞춰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리는가 하면 천 원 한 장을 건네며 끼니는 거르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결국 사람 때문에 힘들지만, 사람 때문에 치유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그에게 가장 기억 남는 일화는 무엇일까. 서영길 씨는 ’6시 50분 해물만두‘라고 답했다. 어느 날 한 고객이 택배 보낼 물건이 있다고 서영길 씨에게 전화를 걸었고 연세가 있는 듯한 그 고객은 몇 시에 올 거냐고 물어봤다. 택배는 업무 특성상 변수가 많아 시간을 약속하기 어려운 일이라 그는 대충 ‘7시에서 9시 사이’라고 알려드렸다. 그런데 그 고객이 ‘6시 50분’에 7시가 다 되었는데 왜 안 오냐고 서영길 씨에게 전화했다. 그는 7시가 조금 넘어 그 집에 도착했고, 거기에는 그를 위한 상이 차려져 있었다고… 그분들은 음식이 식을까 봐 7시에 맞춰 음식을 준비한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들은 물건을 보낼 일이 있으면 6시 50분에 상을 차려 두고 기다렸다. 명절에 세배도 드리러 갔고 만두를 대접받았는데 그 만두에는 유난히 해물이 많이 들어가 있어 특별해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쉽게도 사고로 인해 현재는 인연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서영길 씨는 “아직도 그날의 따스함을 잊을 수 없다”며 “가끔 6시 50분 되어 시장기가 밀려올 때쯤 그 해물만두가 너무나 그리워서 속이 쓰리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한 라디오에 이 사연이 소개되어 이제는 잊을 수 없는 일화로 가슴에 남았다”고 덧붙였다. 

[Episode-3]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천 원의 행복’
작가는 항상 퇴근 후 아빠와 대화하는 것이 익숙해 글을 쓰면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택배를 하면 힘들게 하는 고객들만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며 “4, 5장에는 그런 고마운 분들의 이야기가 담겨있어 많은 분이 읽어봤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4장에는 건네는 것이 작아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천 원의 행복’이라는 제목의 일화가 있다. 빌라에 사시는 할머니는 두세 달에 한 번 아들에게 택배를 보낸다. 항상 요금은 착불로 하시는데 늘 서영길 씨 주머니에 천 원 한 장을 넣어 주신다. 회사 규정상 안 된다고 말씀드려도 노인네는 그런 거 모른다며 끼니나 거르지 말라고 하신다. 그는 다시 건네 드리면 노인네가 주는 거라 받지 않는 거냐고 화를 내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그는 하루에 300개의 물건을 배달해도 고맙다는 말 한 번 못 받을 때가 있고 천국에서 먹는 김밥도 요즘엔 천 원에 살 수 없지만 먹지 않아도 충분히 배부르다고 전했다.

1,000원이 식사를 해결하기 어려운 돈이지만 충분히 배부른 이유는 전해지는 사람의 온기 때문일 것이다. 서영길 씨는 “택배를 보내고 받고 전달하는 것 모두 사람”이라며 “서로의 입장에서 한 번씩만 더 생각해 본다면 모두가 평온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작가 또한 “4장과 5장의 이야기는 좋은 생각을 하게 하는 분들의 이야기”라며 “주변의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는 일화들이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택배를 옮기고 있는 서영길 씨 (사진제공=서영길 씨)
택배를 옮기고 있는 서영길 씨 (사진제공=서영길 씨)

바쁘게 살다 보면 부모님이 직장에서 어떠한 하루를 보내는지, 심지어는 부모님의 직업도 잘 모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작가는 가끔 아버지 일을 돕기도 하며 아버지와의 대화가 일상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책을 준비하면서 부족하다고 느꼈다. 작가는 “평소 아빠와 대화를 많이 한다고 생각했는데 기사 수첩에 빼곡히 적힌 글들을 보고 많이 놀랐다”며 “기사일지는 아빠의 세월을 말해줬다”고 말했다.

작가에게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기록을 보면서 26년이라는 엄청난 시간도 하루하루가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며 “아빠의 기록과 이 책은 힘들고 어려워도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그 다음 날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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