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 종용, 차량수리비 급여에서 빼가

택배업계에서 ‘사고’란 단어는 보통 배송 중에 제품이 파손되거나 분실되는 따위의 일들을 일컫는다. 그러나 엄연히 ‘사고’의 의미에는 배송차량의 교통사고도 존재한다. 사고가 나면 보험사를 불러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실제 택배 현장에서는 택배기사가 보상비용을 떠안는 일도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택배기사들은 내년 5월 시행 예정인 산재보험에 가입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영업소와 마찰이 있을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영업소가 보험처리 거부
택배현장에서 일어나는 차량사고의 처리 유형은 크게 직영차량(소속차량)과 지입차량으로 나뉜다. 직영차량은 대부분 일반적인 차량 보험과 자차 보험에 가입되어있다. 따라서 사고가 났을 경우 자동적으로 보험처리가 되며, 택배기사가 상해를 입었을 경우에도 치료비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직영이 아닌 영업소 소속 차량의 경우 보험 대신 책임을 기사에게 떠넘기는 일도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었다.

한 택배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택배기사 A씨는 지난여름 배송업무를 하다가 승용차와 접촉사고를 냈다. 다행히 양쪽 차량의 파손 정도가 가벼웠고, 크게 다치지 않은 그는 상대방 운전자의 양해를 구하고 영업소에 전화를 걸어 보험처리를 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A씨는 “영업소장이 다짜고짜 얼마나 찌그러졌느냐고 물어보더니 누가 잘못했느냐고 따졌다. 내 잘못이라고 했더니 보험처리는 안되고 현금을 주고 합의를 보라고 다그쳤다”며 “멀쩡한 보험 놔두고 왜 합의를 봐야 하느냐고 물었지만 무조건 책임지라고 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합의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업소에 들어간 A씨에게 소장은 차량 수리비를 급여에서 제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A씨는 강하게 항의했지만 소장은 막무가내였다고 했다. 그는 “영업소에 가서 따졌더니 잘못을 해놓고 영업소에 피해를 끼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더라”라며 “입사하면서 보험 규정에 대해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고 말했다.지입차량에서도 분쟁 발생해택배기사 B씨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그는 “잘못한 건 사실이지만 멀쩡한 보험을 놔두고 기사한테 책임을 지라고 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었다”며 “월급에서 제한다고 해서 설마 했는데 통장을 보니 급여가 덜 나온 걸 보고 허탈했다. 이런 식으로 가져가는 것은 빼앗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영업소에서 차량의 보험료가 올라가는 것에 대한 책임을 기사가 지도록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입차량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지입차량 역시 보험에 가입되어있다. 따라서 지입차주는 사고 발생 시 보험사에서 보상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입차주가 직접 택배업무를 하지 않고 기사를 고용하는 경우 차주가 기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과실이 없는 경우에도 기사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지입차주의 차량을 이용해 택배 업무를 하던 C씨는 사고를 당한 케이스. 상대방 차량의 과실로 차량이 파손됐고, 차량에 탑승했던 C씨는 이틀 간 병원에 입원했으나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C씨는 “상태가 심각하지 않고 하루를 쉬면 그만큼 돈을 벌지 못해서 다시 일하러 나왔는데 지입차주가 병원비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며 “차주에게 입원비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차량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거기에 썼다고 했다. 항의했지만 방어 운전을 하지 않은 책임이 있지 않느냐며 막무가내였다. 결국 내가 받은 보상금은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회사에서 나온것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 택배기사는 “택배업계에서 직영 영업소의 비율이 현저히 낮은 것을 감안하면 이 같은 피해 사례는 더 많을 것”이라면서도 “직영에서도 이런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사들은 정부에서 실태 파악에 나서는 것을 본 적도 없고, 법적으로 대응하는 방법도 몰라 그저 당하고만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일부 택배기사들, 산재 가입할 생각 있어
취재과정에서 만난 일부 택배기사들은 산재보험이 시작되면 가입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한 택배기사는 “택배기사들은 항상 사고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지입차도 없고, 본사 소속 직원도 아닌 힘없는 기사들이 크게 다친다면 살 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산재보험을 한다고 들었는데, 시작하면 가입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보험료를 회사와 절반씩 내더라도 사고 위험을 생각하면 크게 부담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1월 4일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바 있다. 개정안에 따르면 산재보험은 내년 5월부터 시행된다. 업체 소속의 택배기사는 사업자와 절반씩 부담하게 되며, 여러 업체의 주문 물량을 배송하는 경우에는 개인사업자로 간주해 보험료를 본인이 부담하게 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산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을 수 있는 예외 조항이 있긴 하지만 사업주의 강요나 권유 때문에 가입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며 “이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적용 제외 범위를 좁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택배업체와 영업소, 지입차주들은 산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현재 저단가로 힘든 상황에서 산재보험에 나가는 돈 때문에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택배업체에서 택배기사들에 대한 보상 규정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본사쪽에서는 영업소들은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에 보상 문제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라고 하지만 기업의 이름을 걸고 영업하는 사람들”이라며, “ 기업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라도 각 영업소에 보험처리 관련 지침을 홍보하고, 택배기사들에 대한 안전운전 캠폐인도 병행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른 전문가는 “이변이 없는 한 산재보험이 시행될 것이라고 본다면, 업체에서 지금부터라도 산재보험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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