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봄 황장엽 조선노동당 비서의 대한민국 망명, 테레사 수녀의 사망,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 청주국제공항 개항, 월드컵 연속 4회 진출, IMF 구제금융 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IMF 구제금융은 물류산업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렇다고 1997년 내내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IMF전에는 물류산업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당시 물류산업에서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물류신문이 창업했던 1997년으로 되돌아가 본다.

‘화물공차정보시스템’ 정말 사용하기 편리했을까?
1997년의 공차정보를 공유하는 방식은 지금과는 달랐지만 제공되는 서비스는 비슷했다. 당시 내용을 찾아보면 화물공차정보시스템을 통해 제공되던 정보는 화물정보, 지방차 정보, 차주정보, 화주 정보 등 다양했다. 다만 당시 일반전화, 팩스, 무궁화 위성, 주유소, PC, TRS, 휴대폰 및 PCS, GPS 등 활용할 수 있는 모든 통신네트워크를 활용했다는 점이 달랐다. 당시 서비스를 제공하던 기업은 ‘전국의 공차정보를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말 편했는지 당시 사용자에게 물어본다면 ‘그렇다’는 대답은 쉽지 않아 보인다.

‘서류송달’ 줄서는 고객들, 줄서는 기업들
서류송달업. 현재 시장을 찾아보기 힘든 업종이다. 이제는 ‘돈’이 안되는 시장으로 바뀐 탓이다. 하지만 옛날에는 괜찮았던 시장이었다. 1980년대 국내 상업서류송달은 DHL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점시장으로 인해 서류를 송달하기 위해서는 DHL에 가서 업무를 처리해야만 할 정도였다. 이에 국내 기업들은 서류송달업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직영차량은 물론이고 전담 책임제, 24시간 내 배송을 외쳤었다. 서류송달업의 프로세스보다 궁금해지는 건 국내 기업들은 직영 차량, 24시간 내 배송으로 하면서 ‘돈’은 벌었을까?

‘인터넷’도 모르던 1997년, 격세지감 느끼는 정보화
정보화에 민감한 국내 기업들이 ‘인터넷’이란 용어도 몰랐던 시절이 있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1997년 중소기업청과 중소기업진흥공단이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인터넷’이란 용어도 모르는 중소기업이 15.3%나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 인터넷도 모를 정
도면 정보화에 대해서는 말하면 입만 아프다. 그 당시 자료에 따르면 EC(전자상거래), CALS(생산조달운용지원 통합시스템), EDI(전자데이터 교환) 등의 용어조차 모른다고 답한 기업은 무려 40%에 달했다.

쿠리어(국제항공화물) 시장, 7년간의 관계 정리한 UPS
쿠리어시장에서 1997년은 시장을 재편한 시기이다. 해외의 글로벌 기업들은 아시아 시장에 매력을 느끼고 시장을 재편했으면 국내 기업들도 그들과의 협력을 통해 시장에 진출했다. 1997년 DHL과 FedEx는 독자 영역을 구축하기 시작했으며 시장 점유율이 낮던 TNT와 UPS는 새로운 파트너와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아시아 시장에서 5%의 점유율을 갖고 있던 UPS는 고려항공화물과 7년의 관계를 정리하고 대한통운을 새로운 파트너로 맞았으며 27%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던 TNT는 UPS와 손잡은 대한통운을 정리하고 한진과 새로운 파트너쉽을 맺고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

택배시장, ‘상전벽해’ 외에 다른 표현 불가
2017년 상반기 택배 물동량은 11억 1,127만개, 시장규모는 2조 4,861억 원이다. 1997년의 물동량은 2억 개, 시장규모는 2,000억 원이었다. 올해 상반기를 기준으로 보면 물동량은 약 6배 시장규모는 약 12배 늘어난 수치이다. 연말까지 합산하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상전벽해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 말이 더욱 어울리는 것은 그 당시 택배 순위이다. 당시 빅 3인 택배업체의 순위는 한진, 현대물류, 대한통운이었다. 당시 택배사들은 20년 후에 현재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대북물류의 시작은 ‘현대’가 아니다?
대북물류를 처음 시작한 기업은 어디일까? 일반적으로 금강산 관광을 이끌었던 현대그룹의 물류회사였던 현대택배를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초기의 물류사업은 현대가 아니었다. 1997년 경수로 사업과 나진·선봉지역 개발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대한통운, TNT, 대상물류 등이 발빠르게 움직였다. 당시 대한통운은 경수로 지원화물에 대해 해상운송을 시작했으며 TNT는 항공화물 수송권을 가지고 있었다. 대상물류는 나진·선봉 자유경제무역지대에 대단위 국제물류유통센터를 건립하는 것에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대북관계가 경색된 현재 기준으로는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핫한 이슈였다.

20년 전 시작된 부산 신항, 아직도 ‘Ing’
부산신항은 1997년 시작돼 2011년까지 개발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산신항은 진행 중이다. 물론 2006년 개항하면서 대한민국 대표항만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난 2015년 기준으로 부산항은 동북아 1위 환적 중심항만이자 세계 3위의 환적항만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문제도 있다. 배후물류단지의 역할에 대한 문제이다. 항만의 부가가치를 극대화 시키는 임무를 부여받고 개발됐지만 실질적으로는 임무를 달성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성공보장 ‘IMF 다이어트’ 출시, 화제
잊을 수 없는 1997년의 사건 중에 단연 압권인 것이 IMF 구제금융이다. 당시 세계 11번째 경제대국을 자랑하던 우리나라는 갑자기 빚더미에 오르고 미국과 일본을 주축으로 한 IMF의 경제신탁통치까지 받게 되면서 끝없는 추락을 맛봐야 했다. 물류산업에서는 경유가가 인상되고 항공화물 운임이 인상되어 물류의 원재료라 할 수 있는 운송부분에 있어서 타격을 입었다. 또한 정부의 거점사업, 물류 통신사업 등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그야말로 출구 없는 위기가 계속됐다. 하지만 당시의 기업들은 조직을 슬림하게 만들고 필요 없는 자산을 정리하는 등 구조조정을 통해 다이어트에 성공하기도 했다.

동부고속만 신청한 ‘광양항 2단계’
정부의 Two-Port 정책에 의해 개발하게 된 광양항은 1997년 논란과 이슈를 몰고 다녔다. 광양항 2단계에 대한 민자사업 설명회가 1997년에 열렸다. 설명회에는 대한통운, 한진해운, 현대상선 등 20개 기업이 참여해 반짝하는 듯 했지만 결국 동부고속만이 신청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민망하게 했다. 또한 12월 준공식을 한 후에도 낮은 인지도와 배후 수송만 개설 지연 등으로 선사들이 기항을 기피했다. 당시 기업들은 ‘탐스러워 보이지만 먹어봐야 입맛만 버릴 것 같은 과실’이라고 평가했다.

1998년 한다던 철도물류 자회사 설립, 2020년에?
최근 정부는 2020년까지 화물철도 자회사를 분리 추진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20년 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1997년 철도물류에 대해 민간과 공동으로 자회사를 설립하겠다는 내용을 밝힌 것. 당시 철도청은 늦어도 1998년 초에 회사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하고 하반기에 설립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1998년에 설립할 수 있다던 철도물류자회사는 2020년까지 추진한다는 계획으로 바뀌었다. 철도물류자회사의 역할 논란과 찬반을 접어두고 보면 늦어도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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